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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희가 용사를 죽여야해요.

꿀잼 “저희가 용사를 죽여야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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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꾹! 그보다 너, 술 가진 거 있냐?”
 
 
 
빌헬름이 허공에 손을 휘저으며 말했다.
 
눈이 멀어버린 탓에 그가 어디 있는지 몰라
 
아무데나 손을 내민 것이었다.
 
 
 
“……여전하시네요, 당신은.”
“근데 너 누구더라? 으히히, 잘은 몰라도
 
술이나 줘. 술이 없으면 동전이라도…….”
 
 
 
그가 소년의 앞에 비굴하게 굽신거렸다.
 
 
 
어쩌다 이렇게까지 몰락했을까.
 
소년은 흘러넘치는 눈물을 삼켰다.
 
 
 
“뭐야, 없는 거냐? 어쩔 수 없네…….”
“앗.”
 
 
 
빌헬름이 자리에서 일어나 휘청휘청 어딘가로
 
걸어갔다.
 
 
 
“기다려주세요! 저에요, 케이!”
“케이……케이? 그런 술은 모르는데.”
“술 이름이 아니라 제 이름이라고요!”
 
 
 
케이가 그의 어깨를 콱 붙잡았다.
 
 
 
“절 아시잖아요! 함께 그렇게나 고생한 동료를
 
못 알아보실 리가 없잖아요!?”
 
“동료……? 에……뭐더라…….”
 
 
 
그제야 케이는 그를 똑바로 볼 수 있었다.
 
 
 
금색이었던 그의 머리카락은 회색으로 물들고,
 
지저분한 걸레짝으로 눈을 가리고 있었다.
 
강인한 육체는 술과 시간, 절망에 찌들어
 
복수가 차오르고 팔다리는 삐쩍 말랐다.
 
이빨은 몇 개나 썩은 것인지 뭉텅뭉텅 빠져
 
있었고, 입과 몸에선 술 냄새가 풍겼다.
 
 
 
이게, 한 때 최고의 영웅이었던 남자의 말로.
 
차라리 거기서 죽는 게 나았을 것이다.
 
 
 
“아, 기억났다!”
“드디어!”
“예전에 술집에서 같이 마신 사람이지!?”
 
 
 
아.
 
케이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술 때문에 전부 잊어버렸어…….’
 
 
 
간혹 지독한 주정뱅이들 중에선 술 때문에
 
기억을 잃거나 지능이 낮아지는 경우가 있었다.
 
빌헬름도 지난 몇 년이나 술독에 빠져 산 탓에,
 
몇 년이나 함께 싸운 동료를 잊어버렸다.
 
 
 
그는 이제, 눈이 멀어버린 주정뱅이일뿐.
 
신궁이라 불렸던 남자는 죽어버렸다.
 
 
 
“뭐야, 말을 해주지 그랬어. 자자, 또 마시자고!
 
마시고 오늘 아주 그냥 죽어버리자, 으하하하!”
 
“……그럴까요.”
 
 
 
차라리 죽고 싶었다.
 
모든 게 끝난 뒤에도, 케이는 포기할 수 없었다.
 
이렇게 끝나는 걸 납득하지 못했다.
 
 
 
우린 이렇게 끝나선 안 됐다.
 
여정의 끝에 남은 건 절망과 흉터뿐.
 
 
 
그들은 실패했다.
 
그렇기에 고통 받을 뿐이었다.
 
 
 
덜컹, 빌헬름이 문을 열었다.
 
 
 
그의 은신처에선 시체 썩은 냄새가 났다.
 
쓰레기와 음식 찌꺼기가 바닥에 굴러다녔고,
 
심지어 대소변마저 대충 구석에다 싸서 
 
벌레가 들끓고 있었다.
 
 
 
“이런 곳에서 사시는 건가요.”
“우리 집 좋지? 비도 안 샌다고, 으히히.”
 
 
 
빌헬름이 더듬더듬 벽을 만지다가, 찬장에
 
올려놓은 술병을 잡았다.
 
 
 
“이 감촉……저번에 만든 문샤인이네!
 
어이, 이거 어때? 내가 어디서 주워온 건데.”
 
“마셔도 되는 거 맞나요?”
“마시면 눈이 멀어버릴지도 모르지! 크하하!”
 
 
 
그가 자신의 눈을 가리키며 웃었다.
 
케이는, 조금도 웃지 못했다.
 
 
 
“에이 뭐, 안 죽어, 안 죽어! 자자, 마시자고!
 
어차피 망한 세상이잖아, 안 그래?!”
 
“그렇죠……이미 망해버렸죠.”
 
 
 
두 사람이 마주보고 앉았다.
 
빌헬름은 주머니에서 나무잔을 꺼내, 거기
 
술을 따른 뒤 케이한테 건넸다.
 
 
 
“너 이름이 뭐라고 했지?”
“케이.”
“아아, 케이……너무 대충 지은 거 아니야?”
 
 
 
순간, 케이의 몸이 떨렸다.
 
빌헬름이 옛날에 종종 하던 농담이었다.
 
 
 
“그러……네요.”
“뭐, 이름이 뭐 중요해? 자, 건배!”
“건배.”
 
 
 
케이가 술을 한 모금 홀짝 마셨다.
 
 
 
“크흡!? 쿨럭, 쿨럭! 이……이게 뭐야!?”
“엥? 왜, 맛이 별로야?”
 
“끄으으……뭐 이런 맛이…….”
 
 
 
술을 마셔본 게 처음은 아니지만, 이건 너무
 
독하고 또 너무 썼다. 마치 술에 약을 뿌린 것
 
같기도 했다. 정말 그럴지도 몰랐고.
 
 
 
“에잉, 쯔쯔……맛을 모르는구먼, 맛을.”
 
그가 술병을 입에 대고 병나발을 불었다.
 
 
 
“꺼윽, 맛만 좋구먼. 안주가 없어서 미안허이.”
 
“원래 안주, 잘 안 드시잖아요…….”
“이잉? 그걸 형씨가 어떻게 알았어?”
 
 
 
모를 리가 있나.
 
 
 
당시 빌헬름은 아직 어린아이였던 케이를 
 
억지로 술판에 끌어들여, 술을 마시게 하거나
 
옆에 앉혀놓고 허풍을 늘어놓고는 했다.
 
 
 
그때는 그게 정말로 싫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가 정말로 그리웠다.
 
 
 
“정말 저를 기억하지 못하시나요?”
“같이 술 마신 사이 아녀?”
 
“……하. 아주 틀린 말은 아니네요.”
 
 
 
어쩌면, 어쩌면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지도.
 
만약 그의 뇌에 기억의 단편이나마 남아있다면.
 
케이는 그걸 끌어내 보기로 했다.
 
 
 
“7년 전, 저희는 마왕을 죽이기 위해 파견됐죠.
 
사실 저는 중간에 끼어 든 것뿐이지만요.”
 
 
 
당시 케이의 나이는 12살 남짓이었다.
 
마왕군에게 죽을 뻔한 그를 살려준 것이,
 
바로 빌헬름을 포함한 ‘용사단’이었다.
 
 
 
“저는 여러분의 짐꾼이 되어 여정을 따라갔죠.
 
빌헬름 씨, 당신은 거기서 척후를 맡았고요.”
 
“오오, 그랬나? 근데 내 이름이 빌헬름이야?”
“자기 이름도 까먹으신 건가요…….”
“이름 따위야 뭐 아무래도 상관없지.”
 
 
 
그가 남은 술을 모조리 들이켠 후, 바닥에
 
그대로 드러누웠다.
 
 
 
“아이고, 피곤해. 잘 자, 이름 모를 양반.”
 
“케이라니까요.”
“커허어……크허어어…….”
 
 
 
벌써 잠들었어?
 
케이는 그가 정말로 잠든 걸 확인하고선,
 
어이가 없어서 웃고 말았다.
 
 
 
“……정말 다 잊어버린 건가요.”
 
 
 
어쩌면 이대로 두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차라리 전부 잊어버린 채, 하루하루 술이나
 
마시며 사는 게 좋을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제 저희뿐이에요.”
 
 
 
그가 오두막 밖을 보았다.
 
 
 
7년이나 태양은 뜨지 않았고, 매주에 한 번은
 
우박과 기름의 비가 내렸으며 ‘그것’들이
 
나타나 사람들을 습격했다. 
 
 
 
이 세상은 지옥이 되고 말았다.
 
 
 
실패의 대가는, 그들만 짊어진 게 아니었다.
 
 
 
 
 
 
 
 
 
 
 
“빌헬름 씨, 이거 드세요.”
“이게 뭔데? 이거 말고 술이나 가져와.”
“술은 안 돼요, 오늘부터 금주에요.”
“뭐!? 금주!? 이게 날 죽이려고 작정했나!”
 
 
 
빌헬름이 케이가 건네준 죽 냄새를 맡았다.
 
그러더니 웩, 하고선 혀를 내밀었다.
 
 
 
“이잉, 나는 술이 더 좋은데.”
“몸이 너무 망가져서 안 돼요. 여기서
 
더 마셨다간 내일 당장 죽을지도 몰라요.”
 
 
 
그의 배에 찬 복수(腹水)가 그걸 증명했다.
 
술이 간을 망가트려, 더는 간이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여 복수가 차오른 것이다.
 
게다가 그의 뇌도 걱정됐다.
 
 
 
“내일 당장 죽는다면, 그것도 나쁘진 않겠지.”
 
빌헬름이 죽을 떠먹기 시작했다.
 
 
 
“웩, 맛없어.”
“예전에도 죽은 싫어하셨죠.”
“싫어하는 거 알면서 왜 준 거야?”
“그거 말고는 할 게 없어서요.”
 
 
 
그의 집에는 정말 술과 술병 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 이마저도 케이가 근처에 있던
 
마을로 가서 겨우겨우 구해온 것이었다.
 
 
 
태양이 뜨지 않게 된 후로, 곡식과 채소는
 
너무나도 귀해졌다. 누군가는 이 사태로
 
인구의 4할이 죽었다고도 말했다.
 
 
 
식량 문제 죽은 사람만 4할.
 
그것들과 다른 문제까지 더하면, 아마
 
8, 9할 가까이 될 터였다.
 
 
 
“7년 동안 있었던 일에 대해 말씀드릴게요.”
“그게 중요한 문제여?”
“인류를 포함한 지성종의 문명 대부분은
 
이미 멸망한지 오래에요. 겨우 살아남은
 
사람들도 이렇게 숨어 살고 있죠.”
 
 
 
엘프, 오크, 리자드맨, 드워프…….
 
몇몇 종족은 아예 멸종해버렸고, 남은
 
종족도 겨우겨우 목숨만 부지하고 있었다.
 
 
 
“용사단 일원들 이야기도 들으시겠어요?”
“몰라, 그딴 거. 알 게 뭐야.”
 
 
 
빌헬름이 그릇을 휙 던진 후 드러누웠다.
 
 
 
“먼저 저희들의 대장, 용사 아이단…….”
 
 
 
케이는 이 이야기를 꺼내야하나, 말아야하나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이렇게나마 살고 있는 빌헬름을, 또 그 비극에
 
끌어들여야 하는지.
 
 
 
차라리 술에 취해 모든 걸 잊는 게 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케이는 말해야만 했다.
 
그게 살아남은 사람의 의무였다.
 
 
 
“대장은 지금, 마검에 사로잡혀 폭주했어요.”
 
 
 
성검 드레그노어.
 
그 검은 사용자의 마음과 정신의 영향을
 
받아, 강한 정신을 가진 인간이 쓰면
 
어마어마한 힘을 부여했다.
 
 
 
하지만 그 검은 반대로, 사악하고 불안정한
 
정신의 소유자가 잡게 되면 마검으로
 
돌변했다.
 
 
 
“아이단 씨는 지금 폭주한 상태로, 아직도
 
마왕성이 있던 곳에서 날뛰고 있습니다.”
 
“…….”
 
“이대로 두면 살아남은 사람들마저 위험해져요.”
 
 
 
마검은 지금도 강해지고 있다.
 
너무 지체하면, 그 누구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해질 게 분명했다.
 
 
 
가뜩이나 막강한 용사, 아이단의 손에 들어간
 
상태인데 거기서 더 강해지면…….
 
케이는 아찔함에 눈을 질끈 감았다.
 
 
 
“나머지 단원들은 대부분 연락두절, 행방불명
 
상태지만 몇 명은 연락이 닿았어요. 함께
 
가서 아이단 씨를 막으러 가자고 해요, 네?”
 
“누군지도 모르는 사람 얘기를 해도…….”
 
 
 
울컥, 케이가 벌떡 일어섰다.
 
모르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은 2년이나 함께 먹고, 자고, 싸웠다.
 
 
 
어떤 의미에서 그들은 가족보다도 더 가족다운
 
집단이었다. 
 
 
 
“세이리스 씨가 지금의 당신을 보셨다면
 
뭐라고 말했을까요.”
 
“…….”
“그 분은 당신을 살리려고 목숨까지 바쳤는데,
 
당신은 술에 빠져서 인생을―”
 
 
 
그 순간, 케이는 차디찬 살기에 놀라 저도
 
모르게 칼 손잡이에 손을 얹었다.
 
 
 
“……그러니까……모른다고 했잖아. 가서
 
술이나 더 사와, 아니면……이제 나가.”
 
“빌헬름 씨.”
 
 
 
그는 더 이상 말하지 않았다.
 
케이도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 사람은 틀렸나.’
 
 
 
마음의 상처가 너무 큰 걸지도 모른다.
 
어쩌면 그 자신이 기억을 되찾는 걸 포기한
 
걸지도 몰랐다.
 
 
 
차라리 잊는 게 나은 기억.
 
세이리스가, 성녀님이 지금의 그를 보았다면
 
대체 뭐라고 말했을까?
 
 
 
‘모두가 그리워.’
 
 
 
용사단은 총 8명이었다.
 
그들은 함께 싸웠고, 또 어떤 고난이든 함께
 
했다. 그들은 진정 가족이나 다름없었다.
 
 
 
대장이자 용사, 아이단.
 
그는 남들을 이끄는 매력이 넘치던 사내였다.
 
아무리 불리한 상황에서도, 그가 괜찮다고
 
말하면 정말 괜찮다고 생각할 수 있었다.
 
 
 
성녀, 세이리스.
 
 
 
그녀는 아이단과 가장 오랫동안 함께 다닌
 
용사단의 2인자이자, 용사단의 어머니와
 
같은 사람이었다. 마지막 순간, 그녀는
 
빌헬름을 위해 자신의 목숨을 바쳤다.
 
 
 
엘프 마녀, 파스카 아르토리오.
 
 
 
대마녀의 제자이자 용사단의 화력 담당.
 
그리고 용사단에서 가장 똑똑했고, 그들은
 
지혜가 필요할 때 파스카를 의지했다.
 
 
 
오크 격투가, 크로켓.
 
 
 
가장 강한 오크라 불리던 여걸.
 
용사단에서 가장 용감하고, 무모했고,
 
정신이 이상했던 여자였지만, 최악의
 
상황에선 그 누구보다도 듬직했다.
 
 
 
드워프 엔지니어, 홈바바.
 
 
 
그는 자신이 만든 메카닉에 탑승하여 싸웠고,
 
팀내의 장비와 무기를 만들고 정비했던
 
엔지니어였다. 성질은 나빴지만 실력만은
 
확실했고, 모두가 그를 크게 신뢰했다.
 
 
 
리자드맨 기사, 타레크.
 
 
 
리자드맨은 난폭하다는 편견을 깬 사나이.
 
가장 진중하고 냉철했으며, 어떤 무기든
 
수족처럼 다루던 노력한 대전사였다.
 
 
 
궁수, 빌헬름.
 
 
 
신궁이라 불리던 사내, 그는 용사단에서
 
두 번째로 똑똑했고, 또 누구보다도 호탕했다.
 
모두가 그를 좋아했고, 케이도 마찬가지였다.
 
 
 
그리고 그, 케이.
 
 
 
비록 아무 능력도 없지만, 오직 그들의
 
도움이 되고 싶다는 마음만으로 짐꾼을
 
자처한 소년.
 
 
 
그들은 마왕군과 싸웠고, 마침내 마왕을
 
죽이는데 성공했다.
 
 
 
하지만 고작 그뿐이었다.
 
그들은 결국 세상의 파멸을 막지 못했다.
 
 
 
‘빌헬름 씨는 데려가지 못해, 하지만
 
다른 분들이라면 분명…….’
 
 
 
케이가 마을에 도착했을 무렵, 그는
 
뭔가 잘못됐다고 생각했다.
 
 
 
마을에 사람이 한 명도 없었다.
 
비록 몰락한 곳이지만, 분명 어제까지만
 
해도 사람들이 있었던 곳이었다.
 
 
 
“뭐지? 왜 아무도 없는 거야?”
 
 
 
그때, 그가 저 멀리 지평선을 보았다.
 
그리고 왜 마을 사람들이 사라졌는지
 
깨달았다.
 
 
 
“망할, 저게 여기로 오고 있잖아!”
 
 
 
그것, 그것은 다른 이름으로 ‘사도’라는
 
이름으로 불렸다.
 
 
 
평범한 괴물과 달리 그들은 번식하지도
 
먹지도 않았다. 그저 눈에 보이는 모든 걸
 
부수며 전진할 뿐이었다.
 
 
 
그중에서도 몇몇 사도는 아무도 막지 못했고, 
 
마치 재앙처럼 다가와 모든 걸 파괴했다.
 
 
 
케이는 저 멀리서 다가오는, 거대한 산과
 
같은 사도의 이름을 알고 있었다.
 
 
 
“베히모스.”
 
 
 
새까만 몸뚱이에는 수많은 눈과 손발이
 
달려있었고, 수천 개의 촉수가 사방에 있는
 
걸 끌어당겨 흡수했다.
 
 
 
“안 돼, 빌헬름 씨가 위험해!”
 
 
 
저걸 막을 순 없다.
 
어서 돌아가서, 그를 구해야한다.
 
 
 
“으아아아!”
“저, 저게 뭐야!?”
 
그때였다, 어린아이들의 목소리였다.
 
미처 대피하지 못한 아이들이, 오두막
 
안에 숨어있었던 것이다.
 
 
 
“얘들아, 여기서 달아나! 얼른!”
 
“하, 하지만……우리 엄마는…….”
“뭐?”
 
휙! 케이가 오두막 안으로 들어갔다.
 
아이들의 어머니로 보이는 여자가, 침대에
 
누워 끙끙 앓고 있었다.
 
 
 
‘젠장, 이러면 안 되는데!’
 
 
 
빌헬름만 데리고 가는 것도 힘든데,
 
여기서 아이들과 여자까지 데리고 가라고?
그건 불가능했다.
 
 
 
베히모스는 앞으로 15분 안에 이 마을까지
 
도착할 것이다. 저건 생각보다 발이 빨랐다.
 
 
 
“어쩔 수 없나!”
 
 
 
케이가 여자를 등에 업은 후, 아이들의
 
손을 꽉 잡고 뛰기 시작했다.
 
 
 
“저희 어디로 가요!?”
“일단 여기서 최대한 멀리!”
 
빌헬름 씨는, 그는 어쩔 수 없다.
 
그 사람은 이미 살기를 포기했다.
 
나아가기를, 생각하기를 포기해버렸다.
 
 
 
하지만 언덕 위에 서 있던 그를 본 순간,
 
케이는 자신이 틀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빌헬름 씨!”
“케이, 나는 말이야, 이제 그만하련다.”
 
 
 
기억을 되찾은 건가?
아니면 설마…….
 
 
 
“처음부터 기억이?”
 
“아니, 첫 날엔 기억이 없었어. 근데
 
다음 날 아침이 되니 다 떠오르더라고.”
 
 
 
그가 또 병나발을 불었다.
 
 
 
“나 말이야, 이제 와서 말하는 거지만
 
세이리스를 좋아했어.”
 
“네?”
“근데 세이리스 걔는 아이단을 좋아했지.
 
그건 뭐, 딱히 싫지는 않았어― 아이단은
 
나보다 훨씬 좋은 녀석이었으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걸까.
 
이러고 있을 때가 아닌데, 어째서인지
 
케이는 거기서 움직일 수 없었다.
 
 
 
“왜 그때, 나를 살려준 걸까.”
“빌헬름 씨.”
“나 같은 놈보단 네가 살아야 했을 텐데.”
 
 
 
고오오오―
 
 
 
베히모스가, 마을을 뒤엎었다.
 
그것이 바로 등 뒤에 있었다.
 
 
 
“전부 끝났잖아? 그렇지? 우린 실패했어.
 
그러니까 이제, 그만두고 싶어.”
 
“빌헬름 씨, 여기서 도망쳐야 해요!”
“어디로? 나는 술병 안으로 도망치려고 했어.
 
근데 내가 너무 커서 그런지, 결국 그 안까진
 
들어가지 못했어. 바보 같지, 안 그래?”
 
 
 
그가 웃었다.
 
눈이 멀어버린 궁수가 웃었다.
 
 
 
“도망칠 곳 따윈 처음부터 없었던 거야.
 
케이, 대답해다오. 전부 끝난 뒤에도, 그 다음이
 
있을까? 죽음 뒤에도 무언가 남아있을까?”
 
 
 
베히모스가 바로 그들의 앞에 섰다.
 
케이는, 끝을 모르는 거대함에 질려 
 
그저 몸을 떨 수밖에 없었다.
 
 
 
“있잖냐, 케이. 있잖아! 왜 포기하지 않는 거냐?
 
나한테 희망을 주지 마! 이제 그만두라고!
 
다 끝났는데, 세상을 구할 수도 없었는데!!”
 
“그래도!”
 
 
 
케이가 소리쳤다.
 
 
 
“그래도, 그 사람은 구해줄 수 있잖아요?!
 
아이단 씨를, 우리들의 대장님을! 친구를!
 
그렇게 내버려 둘 거냐고요!!”
 
 
 
고오오오―
 
 
 
거대한 촉수가 그들 머리 위로 날아왔다.
 
 
 
“으아아악!?”
 
 
 
죽는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대화중에 끼어들지 마라, 등신아!”
 
 
 
퍼엉!!
 
 
 
거대한 촉수에 구멍이 뚫리며, 찢겨나간
 
촉수가 바닥에 쿵 떨어졌다.
 
 
 
“그오오오―!?”
 
“골 아프니까 소리 지르지 마! 아, 젠장!
 
너도 이 자식도 마음에 안 들어!!”
 
 
 
철컥! 그가 들고 있던 단궁이 펼쳐졌다.
 
 
 
천궁 라하나르.
 
그것은 인간이 쓰는 활이라기엔 너무나도
 
크고 무거워, 평범한 인간은 들지도 못했다.
 
 
 
하지만 그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신궁 빌헬름은, 인간임에도 어지간한 오크보다
 
훨씬 강한 완력을 지닌 사내였다.
 
 
 
더해, 그는 용사단의 두 명뿐인 마법사였다.
 
 
 
“그오오오오!”
“케이, 엎드려! 연쇄 폭발!”
 
 
 
퉁, 퉁, 퉁!
 
베히모스의 촉수가 뚝뚝 끊어졌다.
 
 
 
“대단해―”
“주정뱅이 아저씨, 원래 이렇게 강했어!?”
 
“당연하지! 용사단의 척후니까!”
 
 
 
가장 멀리서, 가장 치명적인 공격을 하는
 
저격수이자 팀의 만능 서포터.
 
 
 
게다가 그의 전투 마법은 마녀 파스카조차
 
몇몇 부분에선 자신보다 뛰어나다고 인정했다.
 
 
 
눈은 멀었고, 몸은 나약해졌다.
 
하지만 그의 실력만은 여전했다.
 
 
 
“그오오오!”
“근데 이걸론 못 죽여요!”
 
“생각보다 큰 모양이네, 쓰읍.”
 
 
 
끼이익― 빌헬름이 활시위를 당겼다.
 
 
 
“케이, 너 달리기 빠르던가?”
“네?”
“크게 한 방 날릴 거니까, 알아서 잘 튀어라?”
 
 
 
설마.
 
 
 
케이가 아이들까지 품에 안고선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천궁 라하나르, 충전 완료!”
 
 
 
기이잉― 활이 금빛으로 불타올랐다.
 
 
 
이것은, 빌헬름이 마왕을 비롯한 진짜
 
강적에게만 쓰던 필살기.
 
 
 
“하늘의 빛!!”
 
 
 
푸슈욱― 한 발의 화살이 구름 너머로
 
치솟았다.
 
 
 
“그오오?”
 
 
 
이윽고, 수천, 수만 개의 화살이 낙하했다.
 
 
 
“우오아아아악!”
 
 
 
베히모스의 몸에 박힌 화살이 폭발했고,
 
또 폭발했다. 
 
 
 
수만 발의 폭탄을 날리는 것과 같은 기술.
 
너무나도 강력하기에, 평소엔 쓰지 못하는
 
신궁 빌헬름의 필살기.
 
 
 
베히모스가 끝없이 이어지는 폭발에
 
휘청거리다가, 끝내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그어어어어―”
 
 
 
콰앙!!
 
 
 
거대한 몸뚱이가 쓰러지며, 마을을 집어삼켰다.
 
 
 
“어, 됐나? 케이, 야! 살아있냐?”
“네, 네!”
“어때? 저거 아직도 안 죽었어?!”
“그걸 맞고도 살아있으면 저게 마왕이죠!”
 
 
 
베히모스는, 케이는 그 시체를 보고선 혀를
 
내둘렀다. 그 거대한 몸뚱이가 갈기갈기
 
찢어져 검은 핏물이 사방에 튀고 있었다.
 
 
 
“실력은……앞도 안 보이면서 여전하네요.”
“무슨 소리를, 예전엔 훨씬 굉장했거든?”
 
그가 짧게 웃다가, 뚝 웃음을 그쳤다.
 
 
 
“……케이, 정말 할 생각이냐?”
 
“네.”
“정말 우리가 아이단을 죽일 수 있을까?”
 
그 질문에, 케이는 대답했다.
 
 
 
“죽일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니라, 죽여야해요.
 
더는 그 사람이 고통 받지 않도록…….”
 
“……그렇군.”
 
 
 
빌헬름이 활을 접었다.
 
 
 
“하는 수 없지. 도와줄게.”
“어, 정말요?!”
“나 아니면 또 누가 그걸 하겠냐?”
 
 
 
옛 친구이자 동료, 대장.
 
이제는 미쳐버린 용사, 아이단.
 
그를 잠재울 수 있는 것은 그들뿐이었다.
 
 
 
“가자, 용사를 죽이러.”
“네!”
 
 
 
이것은 세상을 구하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건 이미 끝나버린 뒤의 이야기.
 
용사의 동료였던 그들이, 용사를 죽이는 이야기.
 
 
 
 
 
 
 
 
 
눈이 멀어버린 궁수가 모든 걸 되찾는 이야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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